해송 명품 8번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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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esolgiki 작성일09-09-13 20:12 조회2,3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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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송 명품 8번의 대화
가을날
주여,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아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완전히 익어가도록 이틀 정도 더 남국의 햇볕을 허락하시어 그들이 무르익도록 해주시고, 묵직한 포도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며들도록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남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깨어나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들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메다닐 것입니다.
시간- 참으로 위대한 단어입니다. 모든 것을 성숙하게 하며 흐트러지게 하고 단단하게 하면서 단단한 것은 흐트러뜨립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분재도 사람도 예외는 아니라서 단정했던 것은 흐트러지고 헤성해성했던 것은 속차오르며 싱그러웠던 것들은 단풍으로 물들어갑니다.
이 나무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손을 댄지 6년 째 이후로 단엽만 하면서 배양하다가 분이 작아 좀처럼 세력이 오르지 않길래 조금 더 큰분으로 분갈이하고 그렇게 또 한해가 흘러갔습니다.
아름답던 모습은 무너지고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채 한쪽에 비켜서는 세월. 그러나 타고난 자태까지는 가릴 수 없어 예솔지기의 손길로 지난 주말 올라왔습니다.
작년 분갈이하면서 단엽을 하지 않아 길 게 자란 잎들이 모두 그대로 남아있고 그중 일부는 이른 단풍이 들어 노랗게 변해 때이른 가을을 재촉하는 날. 아침부터 오랜만의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떨어진 가을잎 가지에도 줄기에도 흐트러진 모습이 내 마음인 것 같아 오래된 방을 청소하듯 거칠 게 자란 머리를 빗질하듯 그렇게 시작한 작업.
그래. 가끔씩은 이렇게 흐트러진 마음들을 다잡아가며 다시 출발하는 거지. 무성히 자란 욕심을 잘라내고 숨어 버린 그대 향한 마음을 끄집어내고 길을 잘못든 가지들은 바로잡아주고 위로만 향한 시선은 옆을 보도록 길들이고....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 우린 이렇게 마음을 다잡아가며 늘 새롭게 시작하는거야. 가을이 조락의 계절이 아닌 늘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 자, 그럼 시작해볼까?
일단 묵은 잎들을 뽑아내기만 해도 마치 오래된 방을 청소하듯 이렇게 개운해지는 것을 다소 헐렁해보여도 결국 나를 채운 것은 부질없는 욕심, 혹은 버려도 좋을 것들이었음을.....
이렇게 묵은 것들을 정리하고 보면 내 모습이 훤히 보이는 걸. 잘못 든 길이 보이고 버려야할 길이 보이고 앞으로 갈길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이렇게 잔가지 하나하나까지 내일을 설계하고 있으니 반가운 손님 한분이 찾아옵니다. 집사람이 타다준 커피를 나눠 마시며 그분의 살아온 내력, 오로지 한길로 달려온 교사로서의 길이 마치 이 나무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올곧게, 그러면서 근본은 탄탄하게 그런데....그런데 말입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주간이 교육이 되고 부간이 가정이 된 것 같아 나름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럼 나는 무슨 나무일까? 삼간? 아니면 다간? 그중에서 주간은 무슨 의미로 채워져왔을까?
하이고, 이렇게 가지 하나하나 철사를 거는 일을 답답해서 어떻게 한 대야? 왠걸요. 교장 선생님께서는 이보다 더 복잡하게 이보다 더 힘든 일을 해오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무가 답답해하잖아. 이것도 길들이는 거예요. 정리하고 길들이고 우리가 아이들도 이렇게 키우잖아요.
어때요? 한번 해보실래요? 안해. 나는 내 성질 잘 알아서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거든. 끝요? 이 작업은 끝이 없는 작업이라 시작하시면 안되겠네요. 끝을 보려면 영원히 죽지 않아야 하는데 그럼 좀 징그럽잖아요. ㅎㅎㅎㅎ
나무 참 좋다. 정리해두니까 볼만 하네. 그래요. 볼만 하죠?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렇게 균형과 조화를 갖춘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균형과 조화를 갖춘 그런 아이들로 자라나고요.
인사를 하고 그렇게 정년퇴임하신 선생님을 보내면서 이 나무의 마지막을 정리합니다. 가을날.... 그 대화의 여운이 사진의 배경처럼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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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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